취미는 그 자체로 기쁨을 주지만, 그로 인해 확장되는 세계를 만나면서 뜻하지 않는 선물을 받기도 한다. 식물을 기르는 덕분에 읽게 된 김금희 작가의 '식물적 낙관'이 나에겐 그런 선물 같은 책이었다. 소설가이자 수십 종류의 식물을 기르는 식집사이기도 한 김금희 작가가 식물과 더불어 살면서 느낀 감정들을 풀어낸 에세이다. 그의 소설은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 작품 속의 문체는 시의 한 구절처럼 섬세해서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글을 읽으면서는 쓰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책을 덮은 순간 다 휘발돼 버렸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생각 몇 가지를 적어본다.
팬데믹까지 겹치면서 어느 때보다 잃어버린 관계들이 많다고 느낀다. 원래 관계란 맺어졌다가 다시 끊어졌다가 하는 것이지만 가까웠던 사람들과 멀어지는 건 세상을 향해 뻗고 있던 가지 하나하나가 잘리는 듯한 아픔이기도 했다. 하나가 잘릴때마다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호의, 기대, 희망, 신뢰를 재조정해야 했으니까. 가지치기 후의 멜라노크리숨처럼 멈춰 서서, 이제 어떻게 할지 막막하게 물어야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중략) 늘 유지되리라 믿었던, 식물로 치자면 하던 대로 줄기를 위로 뻗으면 되리라 여겼던 그 무심한 안정을 끊고 들어오는 관계의 파국. 다들 그런 고비를 어떻게들 넘으며 나이 들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렇게 해서 무뎌지고 있는 것일까.
작년부터 지인들에게는 가지치기 당하고 새로운 인연맺기는 녹록지 않은 날들이 이어지면서 의기소침해하고 있는 나에게 딱 와닿는 글이었다. 어떤 큰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히 떨구어져 버린 관계들이었다. 조금씩 가지치기를 해주고 있는 클루시아 줄기를 보니, 바싹 잘라버린 가지 끝은 서서히 아물어 그대로 끝맺음을 했고, 생장점이 남아있던 가지는 새 잎을 내고 있었다. 이제 덧없는 인간관계에 목숨 걸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기 무섭게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손을 놓아버린 관계가 다시 이어지기도 하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 언제 끝날 지 알 수는 없지만 그냥 무심히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만약 식물에게서 매번 고통을 상상한다면 식물을 기르는 방식은 매우 왜곡될 것이다. 잎을 떨어뜨리거나 가지를 휘거나 적절한 시기가 되면 꽃을 말려 떨어뜨리는 식물의 행태는 식물의 방식대로 읽을 때 비로소 본질에 맞는 자연적 행위가 된다. 가드닝을 하며 식물과 나는 생존의 드라마를 함께 겪지만 그것은 인간인 내가 구성한 것일 뿐 사실 거기서 발생하는 상념들은 식물 자체와는 무관하다. 그 무관함, 발코니에서의 날들이 계속되면서 나는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무관함이라는 생각을 한다.
싱싱한 가지를 일부러 자르는 행위에 죄책감 아닌 죄책감을 느끼던 때가 있었기에-사실 지금도 약간 그렇다- 저 말이 더 뜨끔하게 느껴졌다. 얽혀있는 가지를 자르는게 오히려 식물들의 성장에 더 도움이 되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가지치기를 하는 손길이 약간 과감해졌다.
식물을 키우고 난 뒤부터는 가로수를 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졌다. 겨울에 죽은 듯 메말라 보이던 나무들이 어느새 푸릇푸릇한 잎을 수없이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감탄을 하곤 한다. 이런 위대한 일을 매년 반복하면서도 요란스럽지 않은 저 나무들처럼 나도 이제 지나친 자기 연민을 멈추고 '그냥'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이 작품 마지막 나오는 말에 나오는 '식물적 낙관'을 삶의 모토로 삼아서 말이다.
식물에게는 지금 이곳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엄정한 상태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역설적으로 식물들의 낙관적 미래를 만들어낸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 성장할 수 있다면 환희에 차 뿌리를 박차고 오르는 것, 자기 결실에 관한 희비나 낙담이 없는 것, 삶 이외의 선택지가 없는 것, 그렇게 자기가 놓인 세계와 조응해나가는 것. 이런 질서가 있는 내일이라면 낙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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